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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

백선엽 예비역 장군의 6.25 회고록 '군과나'

아직 생존해 계신 백선엽장군이 3번째 출판회에 나오셔서 싸인회를가지고있다




 한국전쟁관련 책을 뒤지다가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을 발견했다.  이번이 세번째 출판이라는데그 동안 한번도 접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나도 참 게을렀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펼치면 6.25 전쟁 개전부터 휴전까지 야전지휘관으로써 전장을 누비며 몸소 경험했던 사실이 영화로 보는듯
눈앞에 펼쳐진다. 어쩌면 현장에 있었기에 더욱더 화약냄새나는 생생한 기록이 묻어있는지도 모른다.

당시 1사단장이였던 백장군은 서부전선에서 북한군을 저지못하고 중부전선과 같이 붕괴되어 서울로 밀려들어갔다.
그나마 탈출할수있는 인도교또한 서둘러 폭파되는바람에 민간피난민은 물론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어야할 국군마저
강북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군인들은 장비를 모두 버리고 구사일생으로 각자 소개해 한강 남쪽에서 집결한다.

전쟁이발발하면서 사단 최전방에 갔던 백장군은 막  다리를 건너오려는 북한군을보며 다리폭파를 공병대에 지시했지만
터지지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전진을 도운꼴이되었으니 당시 우리 국군의 형편이 어떠했는지 짐작이간다.
동부전선의 김종오 사단장의 처절한 저항으로 시간을 조금 벌었지만 이내 수도서울을 내주면서 남으로 남으로 후퇴하는 국군

맥아더의 참전으로 스미스부대(2차대전후 주일미군으로 미24사단소속 21연대 스미스중령 휘하부대)가 급하게 일본에서 왔지만 죽미령에서 매복 기습을 시도하다가 t34/85 무장한 북한군에 두들겨맞고 대패했다. 이때가 미군과 북한군이 최초로 교전한 시점이며
미군도 북한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했음을 알게되는 계기가 된다.

백장군 또한 없는 병력에 수시로 반격해 시간을 조금씩 늦춰보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을 역전시킬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결국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보급물자와 유엔지원군이 도착할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데...

백장군은 한국군으로써는 유일하게 미군과 같이 작전을 수행했으며 화력지원은 물론 고위지휘관들로부터 대폭적인 신뢰를
받아 큰그림을 그리며 전황에 대응하는 기회를 많이 가졌다.
무엇보다 영어를 구사하는 능력과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가졌다. 꼭 필요하다면 자기를 굽혀서라도 부하장병들을
살려내는데 서슴치않았으며 단순히 출세가도가 아닌 진정한 직업정신에서 오는 사명감으로 임무를 완수해 많은이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얻었다.

백장군은 국군이 탄생한 이례로 최초라는 수식어를 많이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보(한)전(미)합동작전을 처음 운용했으며. 국군최초의
4성장군이기도하다.

지금 살아계신 백장군은 살아있는 역사 되시겠다.

1946.02 - 국방경비대 육군부위(중위) 임관     
1947.01 - 제5연대 연대장     
1948.04 - 통위부 정보국 국장     
1949.07 - 1950.04 제5사단 사단장        
1950.04 - 제1사단 사단장     
1951.04 - 1952.07 제1군단장 (육군 소장)        
1951.07 - 휴전회담 한국대표     
1951.11 - 백 야전전투사령부사령관     
1952.04 - 제2군단 군단장     
1952.07.23 - 1954.02.13 제7대 육군참모총장(대장)     
1953.01 - 초대 육군대장        
1954.02 - 1957.07 제1야전근사령관        
1957.07.23 - 1959.02.13 제10대 육군참모총장(대장)     
1959.02 - 1960.05 제4대 연합참모본부 총장(육군 대장)     
1960.08 - 1960.06 예편(대장)        

ps: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백장군이 만주군 간도특설대 즉 항일무장독립군 토벌임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머리가 좀 혼란스러워졌다.  아무리 6.25 전쟁 영웅이라지만 역사는 역사다. 친일 행각을 덮는건 언어도단이다.
군과나를 읽으면서 놓친부분을 다시 보니 미화되어 표기되어있는 부분을 볼수 있었다.
안타깝지만 내가 젤 싫어하는 일본군 장교였다니...........더 이상 할말이 없다..속은 기분이 든다